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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 세상을 바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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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보다도 2021. 4. 1.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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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log.daum.net/windada11/8762522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1991)

 

고인이 된 이후 나온 7집 [Self Portrait](1996)의 인트로.

그가 생전에 라디오에 출연해 털어놨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편집되어 흘러나온다. 어쩌면 이렇게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절망적일까. “건강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회복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에게, 어느 DJ가 일생의 소원을 물으니 참 무기력한 답을 준다.

 

“목소리가 사실 갔거든요. 제일 바라는 게 그거죠.”

 

어린 시절의 기억도 털어놓는다.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살았던 유년 시절의 그는 전학할 때마다 놀림을 당했고, 그럴 때마다 싸웠고 또 외로워했다고 말한다. 그 싸움과 외로움은 곧 노래가 됐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 있었다. 배가 고파야 노래가 더 잘 됐던 것 같다. 나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방황, 좌절 등 여러 가지 좀 나쁜 경험이 많은 편이다.”

 

돌이켜보면 김현식은 행복할 수도 있었다. 그를 늘 걱정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당장 병원부터 가야 하나 녹음을 지속해야 하나를 함께 고민하던 절친한 동료들이 있었다. 2집 전후로 맺게 된 동아기획 식구들과의 인연, 차차 확장되는 새로운 인연들이 그랬다. 많은 이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동방의 빛과 메신저스 등 밤무대 생활을 함께 하던 친구들, 그리고 나중에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는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 더 나중에 만나 그에게 블루스를 일깨운 이정선 엄인호 같은 동료들의 이야기다. 그들과 교감하면서 그의 음악은 거듭 발전했고, 그 길목에서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의 히트곡을 얻었다.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자 수많은 라디오와 음반매장이 그를 찾았고 곧 방송국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현장을 더 사랑했다. 공연만으로 뮤지션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될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는 1990년 11월 1일, 33세의 그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에 의한 간경화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여느 때와 다르게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닌 다른 노래가 매체와 거리를 뒤덮었다. 김현식이 남긴 ‘내 사랑 내 곁에’였다.

병원에 있다가 탈출했다가를 반복하는 김현식과 동료들의 근심 속에서 가녹음된 노래는 그가 눈을 감자 어느새 동네 꼬마들까지 흥얼거릴 수 있는 1990년의 노래가 되었다. 노래가 수록된 6집은 순식간에 100만 장이 넘게 나갔고, 골든디스크는 ‘내 사랑 내 곁에’에 대상을 안겼다. 과연 세상이 함께 아파하고 탄식할 만한 노래였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가수의 사연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더없이 서정적인 선율과 공허한 가사를, 그는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누구보다도 절박하게 울부짖으며 실어 나른 보컬리스트였다.

 

노래를 만든 오태호도 부상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당시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오태호가 본격적으로 스튜디오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만든 노래로, 김현식은 나중에 작곡가 이력을 쌓게 되는 오태호의 싹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이다. 연습 삼아 자작곡을 홀로 연주하고 있는 오태호에게 다가간 김현식은 곡을 달라 요구하고 승낙을 얻는다. 그리고 작곡가의 손을 떠난 노래를 성치 않은 몸으로 녹음했는데, 가녹음 버전을 들어본 후 오태호는 편곡과 보컬 모두에 만족하지만 작은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 가는데’ 대목이 원래는 ‘시간은 멀어짐으로 향해 가는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수정되지 못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노래를 남기고, 그는 갔다.

 

완벽하게 마친 상태가 아니라서 떠난 자의 인생이 더 명확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내 사랑 내 곁에’를 들을 때면 눈 앞에서 휘청거리며 노래하는 김현식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도입부의 처연한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면, 이윽고 지나간 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절절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많이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을 영영 받아들이지 못한 삐딱한 남자, 언제나 열정과 열망이 가득했지만 그만큼 많은 좌절과 절망과 씨름하면서 살아온 불행한 사내의 회한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비틀거리던 그는 끝내 몸을 안길 곳을 찾지 못했다. 저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제는 알지 않을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노래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남기고 간 노래는 신화적인 유작으로 남았다는 것을.

 

 

 

 

 

 

김현식 '비처럼 음악처럼 (1986)

 

약간의 의견차가 있긴 하지만 ‘비처럼 음악처럼’이 수록된 김현식의 3집은 그의 짧은 일대기에 가장 높이 떴던 두 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2집의 결과물이 나빴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했어요’, ‘어둠 그 별빛’, ‘바람인 줄 알았는데’가 휩쓸고 사라진 자취를 과연 쉽게 지울 수 있을까. 그러나 김현식을 그 자신의 단막극에서 하이라이트로 만든 노래는 '비처럼 음악처럼'이다. 1986년이었고, 들국화라는 선각자가 언더그라운드 씬을 닦아놓은 후였으며 세상엔 아직 그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의 뒤에는 밴드 체제로 그와 음악을 함께 한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었다.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앨범 발매 직전 탈퇴하고 박성식이 가입)로 짜인, 무작위로 선발된 것보다 더 기막힌 우연으로 한 팀에 몸담게 된 이 멤버들의 기량은 출중함 그 이상이었으며 김현식의 음악을 더욱 빛내준 면면들이 되었다.

김현식 본인이 쓴 곡들과 유재하가 쓴 ‘가리워진 길’, 장기호가 쓴 ‘그대와 단둘이서’, 김종진이 쓴 ‘쓸쓸한 오후’들의 공명을 보라. 사실 이보다 더 절묘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이보다 더 조화롭기도 어려웠다.

 

정점을 제시한 곡은 박성식이 준 ‘비처럼 음악처럼’이다. 3집의 노래 타이틀을 유심히 훑어보면 유독 비와 연관된 노래들이 많다. ‘빗속의 연가’도 있고 ‘비오는 어느 저녁'도 있다. 모두 쓸쓸하고 처연하며 어느새 김현식 특유의 페이소스로 감상자를 흡수해버리는 수작들이다.

그러나 지금도 비가 내리면 끝없이 각인되고 되풀이되는 노래는 ‘비처럼 음악처럼’이다. 노래는 숱하게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리퀘스트되었고 지금도 간간이 비 내리는 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날씨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노래가 가진 매력을 그것만으로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세상엔 ‘유일성’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아직은 목소리가 탁성으로 바뀌기 전이지만 이미 그 안에 한국형 블루스의 단초를 품고 있었던 김현식의 보컬은 ‘대체불가능성’이라는 말을 신뢰하고 싶을 만큼 독보적이며 아름답다. 지극히 통속적인 노랫말을 담은 이 평범해도 좋았을 노래는 그의 목소리를 빌어 비로소 새 삶을 얻게 된다. 감히 주장해 본다. ‘비처럼 음악처럼’에 관한 한 그 누가 김현식으로 분할 수 있었을까? 이름값 있는 어떤 가수를 들고 오더라도 그건 무리다. 그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처절하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신파극’이었으니까. 그것이 김현식의 호소력이고 설득력이었다.

 

노래는 곧 다운타운을 잠식했고, 앨범은 수십 만 장의 세일즈를 기록하며 김현식이라는 브랜드를 널리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가면이 필요했던 방송국의 생리는 그와는 도저히 성정이 닿을 수 없는 장소였고, 다시 그는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벌어졌던 현실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변화는 훨씬 빨랐다.

피어났던 들국화는 얼마 후 꺾일 운명이었고, 그 자신도 자신의 운명을 어쩌면 예감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비처럼 음악처럼’은 한국 언더그라운드가 토해낸 가장 화려하고 또 위태로운 순간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세상을 바꾼 노래 소개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아름다운 이별/ 전설의 죽음 ② 故 유재하, 김현식

너무 일찍 떠나 안타까운 천재들의 이야기

 

요절한 천재 뮤지션, 유재하

 

1987년 11월 1일, 한 가수가 친구의 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제 겨우 1개의 음반을 발표했던 20대 중반의 그 젊은 가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단 한 장의 음반으로 한국 발라드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 받는 가수 유재하의 이야기다.

 

흔히 농담처럼 나오는 소리로 한국 발라드계의 4대 천왕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네 명의 가수는 이문세, 변진섭, 신승훈, 조성모다. 이들은 80년대 이후 발라드계의 전성기를 이끌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인기를 누긴 가수들이다. 어마어마한 음반 판매량을 자랑하며, 각자 여러 개의 관련 기록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앞서 한 명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 혜성처럼 나타나 각자의 역사를 써나갔다. 정말이지 이들을 빼고 한국 발라드를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유재하는 분명 이들에 견줄만한 인기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가수는 아니다. 그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 첫 음반을 냈으며, 그가 대중에게 제대로 평가받고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단 한 장의 음반은 지금까지 한국 발라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명반으로 꼽히며, 단 한 장의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지금까지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OST를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쉽게 들을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했다. 순수음악을 전공했으며, 작사, 작곡, 편곡 실력에 다룰 수 있는 악기도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국내 최고의 밴드인 ‘조용필과 위대한 밴드’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활동하며 이미 주변 음악인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유재하의 음악이 높이 평가 받고, 아직까지 한국 가요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이러한 음악적 배경이 깔려있다. 순수음악의 화성학을 대중가요에 반영함으로써 한국 발라드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 받는 것이다.

 

유재하의 음악은 이론적인 완성도도 높았지만, 정돈된 서정성과 감수성이 돋보이는 가사도 상당한 수준이다. 많은 발라드 가수들은 유재하를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꼽고, 스스로 유재하에게서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1989년부터 시작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는 유재하를 기리고,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던 수많은 뮤지션들이 발굴되어 지금 한국 가요계를 이끌고 있다. 1회 대상 수상자인 조규찬부터 시작해 토이의 유희열, 일기예보의 강현민과 나들, 나원주, 루시드폴, 이한철, 작곡가 방시혁과 심현보, 최근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윗소로우까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뮤지션들이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유재하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면 한국 대중음악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고. 이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단 한 장의 음반으로 그만큼의 족적을 남겼으며, 그 족적의 의미는 가히 서태지가 한국 대중음악계 전체에 끼친 영향과 견줄만 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더욱 그의 노래에 애착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설이 된 자유인의 카리스마, 김현식

 

유재하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같이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다. 그와 밴드를 함께 했던 김현식이다.

 

음악 하는 사람이 다른 뮤지션과 밴드를 함께 한다는 것을 새삼 특별할 일은 없다. 실제로 두 사람은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음반을 만들었지만, 유재하는 음반 발매 직전 밴드를 탈퇴했다. 음반 판매량 30만장의 히트를 기록한 밴드였지만, 실제 음반 이후의 활동에는 두 사람이 함께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김현식은 일찌감치 유재하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상당히 많은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3년 후인 1990년 11월 1일 지병으로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인연은 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됐다.

 

김현식은 음악계에서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통했다. 거칠고 탁한 목소리, 터지듯 갈라지는 창법은 모두가 곱게만 노래하려고 하는 가요계에서 가장 독특한 그만의 개성을 만들었다. 그는 그런 목소리로 락, 블루스, 발라드, 소울, 심지어 트로트까지 소화해내며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흔들었다. 또한 그는 방송 시스템에 회의를 느껴 주로 언더그라운드 공연을 통해 활동했던 가수였다.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의 길을 쫓는 자유인, 그런 이미지는 김현식의 카리스마를 형성하는 핵심이었다.

 

‘사랑했어요’, ‘골목길’, ‘비처럼 음악처럼’, 그리고 유작이 된 ‘내사랑 내곁에’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많은 이들이 그의 음악을 추억으로 기억하는 한편, 그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읊어지는 사랑의 감정에 감동했고, 지금도 감동하고 있다. 그의 가창력과 작품, 타협하지 않는 매력적인 이미지까지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무수히 많은 히트곡들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연으로 굴곡졌다. 몇 차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됐고, 좌절과 재기를 반복했으며, 밤무대 가수에서 골든디스크 수상자가 되기까지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다. 이런 거친 삶은 그의 카리스마는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전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 힘든 삶의 굴곡 속에서 이어진 폭음과 줄담배, 과로는 그의 몸을 병들게 했고, 결국 그는 33세의 역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그가 죽음과 싸우며 만든 마지막 앨범 수록곡 ‘내사랑 내곁에’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그 앨범은 같은 해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가 사후 얻은 이러한 세속적 성공이나 영광 보다는 조금 더 그의 음악을 오래 듣고 싶었다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거친 삶과 안타까운 죽음은 그에게 어쩌면 숙명인 것처럼 기억되고 있지만, 그의 음악은 그의 이미지보다 훨씬 가치 있고 위대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짐으로 향해 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을 모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 세상 하나 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 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 세상 하나 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 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님 / 김현식

 

간다 간다
정든 님이 떠나간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님의 가슴 부여 잡고 울어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드라 속절도 없이

오는 정 가는 정에 정이 들어 사랑을 했던 님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게 가시나요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추억 만들기 / 김현식

 

새끼 손가락 걸며 영원하자던

그대는 지금 어디에

그대를 사랑하며 잊어야 하는

내 맘은 너무 아파요

그대 떠나는 뒷 모습에 내 눈물 떨구어 주리

가는 걸음에 내 눈물 떨구어 주리

 

내 마음 보여줘 본

그때 그 사람

사랑하던 나의 그 사람

뜨거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갑니다

 

세월이 흘러가서 백발이 되어버리고

얼굴엔 주름지어 내 사랑 식어버려도

내 마음 보여줘 본

그때 그 사람

사랑하던 나의 그 사람

뜨거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갑니다

 

 

 

 

 

이별의 종착역 / 김현식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 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이 만은 왜 못 오나?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별의 종착역.

 

아...언제나 이 가슴에

덮인 안개 활짝 개고

아...언제나 이 가슴에

밝은 해가 떠오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네 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아...언제나 이 가슴에

덮인 안개 활짝 개고

아...언제나 이 가슴에

밝은 해가 떠오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네 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비처럼 음악처럼 / 김현식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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