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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김윤덕의 사람人] "주방장은 하얀 모자 쓴 축구코치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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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보다도 2021. 4. 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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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2/2011072201135.html

김윤덕 문화부장

입력 2011.07.23 03:20 | 수정 2011.07.23 10:20

"에드워드 권? 유별났지. 리츠칼튼 연회장에서 스테이크 소스 만드는 조리사였는데, 총주방장인 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궁금한 게 생기면 당장 달려와 물었지. 집념과 야망이 대단한 친구였지."

롤랜드 히니(Hinni)는 웨스틴 조선, 신라, 리츠칼튼, 하얏트 제주 등 특급호텔의 총주방장을 역임한 스위스 베른 출신의 베테랑 요리사. 스타 셰프가 된 에드워드 권(권영민)에 대해 "지금도 그의 방식으로 잘하고 있다"며 대견해하던 그는, "한국의 된장·청국장이 스위스 치즈의 냄새, 발효 스토리와 아주 닮아 좋아한다"며 싱긋 웃었다. 롤랜드 몸집의 1.5배는 돼 보이는 또 한 명의 베테랑 요리사는 레모 베르둑(Berdux). 하얏트, 리츠칼튼, 메리어트 홍콩의 총주방장을 거쳐 현재 루프트한자 계열사인 LSG 스카이셰프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 "요리는 노동이 아니라 펀(fun)"이라고 단언하는 그는, 음식 얘기만 나오면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가며 열변을 토했다. 웨인 골딩(Golding)은 호주 출신으로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의 총주방장이다. 웨인은 어부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어부 집안이라 내가 해물요리, 특히 랍스터에 강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란 눈의 세 남자가 한자리에 모인 건 '하얀 모자' 때문이다. 한국 호텔과 유명 식당에서 일하는 외국인 셰프들의 모임. 롤랜드가 1981년 '하얀 모자'를 결성한 초대 회장이고, 레모가 현재 회장이다. 호텔을 떠난 롤랜드가 최근 서울 통의동에 문을 연 유러피언 식당 '가스트로 통'에서 세 남자를 만났다.

“실전도 아닌데, 모자를 꼭 써야 해?” “모임 이름이‘하얀 모자’인데 당연히 써야지.”왼쪽부터 웨인 골딩, 롤랜드 히니, 레모 베르둑. 세사람은 셰프 모자를 써달라는 주문에 아이들처럼 투덜댔다. 그래도 카메라가 다가오자“김치~” 하며 웃는다.

◆한식의 세계화? '빨리빨리' 하면 안 돼

―"'하얀 모자'는 친목 모임인가?

"국제조직이다. 파리에서 1978년 결성됐고, 지금은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다. 셰프들 사이 커뮤니케이션, 정보 교환, 네트워크를 쌓는 데 주력한다."

―어떤 정보들을 교환하나?

"새로운 레서피, 신선한 식재료에 대한 정보. 한국에 없는 재료를 들여오는 방법, 수입규제에 관한 지식도 나눈다."

―좋은 식재료를 찾아다니는 여행도 한다고 들었다.

"최근 서해안 굴 양식장에 다녀왔다.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굴을 양식하는데 퀄리티가 아주 높더라. 그릇 보러 '광주요' 같은 데도 가고, 멧돼지 고기를 구하려고 홍천에도 갔다. 불우한 환경의 요리사 지망생들도 돕는다."

―자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한국미식가협회와 함께 요리사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소녀 가장들의 대학 등록금을 후원한다. 지난해부터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지원한다. 얼마 전 곡성의 아이들 40명이 서울에 올라와 힐튼호텔, 63빌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재능 있는 젊은 요리 학도들을 '세계 블랙박스 컴피티션'에 내보내는 일도 돕는다. 블랙박스 안에 숨은 재료를 가지고 즉석에서 요리를 만드는 대회다. 2008년엔 한국팀이 세계 챔피언이 됐다."

―활약상에 비하면 '하얀 모자'가 미디어에 거의 노출이 안 됐다.

"요란스럽게 내세울 일이 아니니까. 한국에서 일하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다."

―외국인 셰프들 사이 최근 이슈는 뭔가.

"와인 수입시장의 현황에 관한 것. 최근 모임엔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와서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식의 세계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 들어온 날부터 거의 매일 들어온 질문이다.(웃음)"

―그래도 얘기해달라.

"뉴욕만 해도 한식 마니아가 크게 늘고, 미디어에서도 한국 음식을 자주 소개하고 있지만 시간은 좀 더 걸릴 거라고 본다. 문제는 한식의 세계화를 너무 '빨리빨리' 밀어붙이는 거다. 프랑스 음식의 명성은 사람들이 프랑스로 여행을 가고, 또 프랑스 요리사들이 각 나라에 나와 자국의 음식을 선보이고 그걸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한국엔 뛰어난 셰프들이 많지만 해외로 나가 활약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우리만 해도 스위스 음식, 혹은 호주 음식의 세계화라는 임무를 띠고 한국에 나온 게 아니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표준화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온다.

"'매운탕'을 소리 나는 대로 'Meuntang'이라고 적어놓은 메뉴판을 봤다. 어떤 재료로 조리된 음식인지 영어로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식의 조리법, 표기법을 표준화시킨 뒤 각국 대사관을 통해서 홍보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 식재료를 메뉴별 패키지로 개발해 내보내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한식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것도 문제다. 한국에선 8000원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유럽에선 2만원 내고 먹어야 한다. 값은 프렌치처럼 비싼데 음식의 질은 들쭉날쭉하고, 반찬 하나 추가하면 비용을 더 받으니 어떻게 한국 음식이 세계화될 수 있겠나."

―국내 특급호텔에서 한식당이 사라지는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일반 식당에 가면 5000원에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는데 누가 호텔에 와서 1만5000원이나 주고 먹겠나.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적인 체인 호텔들은 대개 타국의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현지 음식은 호텔 밖 식당들에 맡긴다. 만일 해외에 한국 호텔이 문을 열었다면 당연히 한국 식당이 있어야겠지. 필리핀 세부에 오픈한 임피리얼 팰리스의 한식당이 성황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국경과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꽃피운 롤랜드와 김영심씨 부부. 지난 11일 통의동에 유러피언식당 ‘가스트로통’을 열었다. 유럽식 갈비찜, 라클레, 퐁듀 등 프랑스·스위스·독일 음식을 맛볼수 있다.

요리는 노동이 아니다, 펀(fun)이다

열한 살에 처음 요리를 시작했다는 롤랜드는 17세 때 호텔 주방에 입문했다.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요리를 배웠다"는 그는 군대에 3개월 다녀온 뒤 스위스를 떠났다. 짐바브웨, 두바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서울의 웨스틴 조선호텔에 들어온 때가 1980년. 그는 "내가 허브 루콜라를 들여온 주인공"이라며 웃었다. 레모는 열네 살에 요리 견습생이 됐다.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어머니가 이모와 함께 스위스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빵 굽고 잼 만들고, 우리 집 주방은 언제나 바빴다." 1994년 서울 하얏트 부총주방장이 됐고, 인도로 나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롤랜드의 후임으로 리츠칼튼 서울 총주방장이 됐다. 웨인은 늦깎이다. 16세 때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어부·목수·건축일을 경험한 뒤 직업으로서 요리사가 된 건 24세였다. 인터콘티넨탈 시드니를 시작으로, 두바이, 하노이에서 일했다. 한국 생활은 7년 전 메리어트 호텔에서 시작했다.

 

―다들 10대에 요리에 입문했다. 열네 살에 수련생활을 시작했다는 게 놀랍다.

"아홉 살, 열 살에도 가능한 일이다. 집에서는 그보다 어릴 때라도 할 수 있고."

―아이에게 칼과 불은 위험하지 않나?

"어른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가르치면 되지. 약간의 화상은 좋은 교육이 된다."

―한국에선 대학 나오고 조리사 자격증까지 따고 나면 이미 스무 살이 넘는다.

"한국 학생들은 자격증만 많지 주방에서 실전을 경험한 시간은 거의 없다. 너무 나이가 들어서 주방에 온다. 솔직히 요리사가 되기 위해 왜 대학을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24세 이하의 젊은 요리사들만 참여하는 국제대회가 있다. 한국에선 출전할 수 있는 젊은 쿡(cook)이 없다. 어느 유명한 레스토랑은 가장 어린 조리사가 34세라더라."

―어떤 요리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요리사에게 조리복은 참 많은 힘을 주는 무기'라고 썼다.

"사실이다. 의기소침해 있을 때 유니폼을 입고 주방에 들어서면 에너지가 솟는다. 요리라는 게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뭔가를 창조해내는 일 아닌가. 엔돌핀이 솟는다. 요리는 노동이 아니다. 펀(fun)이다."

―12시간 이상 선 채로 일해야 하는, 굉장히 고된 일이다.

"그걸 견뎌내야 요리사다."

―아널드 웨스커의 연극 '키친'은 주방이 세상의 축소판임을 보여준다.

"호텔 주방은 풋볼(football) 팀과 비슷하다. 공이 왔을 때 이걸 받을 거냐 말 거냐 고민할 시간이 전혀 없다. 무조건 잡아채 재빠르게 다음 액션을 취해야 한다. 주방장 손에 주문이 들어오는 순간 각자 역할대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뛰어야 한다."

―호텔 주방은 매우 거칠고 권위적인 조직이라고 들었다.

"'불을 이기지 못하면 주방을 떠나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늘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데다 채소와 육류 등의 신선도를 철저히 유지해야 하니 조직을 강하게 운영할 수밖에 없다."

―체벌도 하나? 옛날엔 프라이팬으로 맞는 수련생들이 허다했다더라.

"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건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다."

―수십 명의 조리사들을 이끄는 총주방장의 리더십은 어떻게 구현되나.

"풋볼 코치처럼 선수들이 각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 구석구석 조직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전체의 방향을 잡는 것. 그리고 총주방장은 자신이 직접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새롭게 배우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스타 셰프'들의 시대이기도 하고, 개나 소나 요리사라고 나서는 시대이기도 하다.

"똑같은 레서피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나온다. 제과제빵은 화학자가 실험하듯 레서피대로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쿠킹은 다르다. 미술작품과 비슷하다. 요리사 개인의 취향, 손님의 취향이라는 변수가 얽혀서 평가도 아주 다양하게 나온다. 중요한 건 열정이다. 요리에 대한 열정 없이 기계적으로 스테이크를 구우면 육즙이 흘러내린다. 음식을 존경하는 마음이 진짜 요리사를 만든다."

우리는 한국인 아내와 산다

세 남자의 공통점은 한국인 아내를 두었다는 점이다. 하얏트 서울에서 아내를 만난 레모는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결혼해서 처음 동해의 처갓집에 갔다. 아내와 함께 음식 만들고 그릇도 치우니까 남자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지금은 남자들도 똑같이 명절에 일한다.(웃음)" 롤랜드는 와인전문가인 아내 김영심씨에게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운 뒤, 매년 김장을 해서 집 마당에 묻는다. 한복려 선생에게 궁중음식도 배웠다.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싶었는데 한글로 나오는 시험문제를 읽지 못해 미끄러졌지."

―한국 음식에 대한 첫 경험이 궁금하다.

"김치의 이상한 매운맛! 홍어회는 지금도 못 먹는다. 삼계탕은 정말 좋은 음식이다."(롤랜드)

"번데기 냄새에 몸서리를 쳤다. 북어해장국, 칼국수는 음~ 언제 먹어도 맛있다."(웨인)

"냉면은 정말 뷰티풀하다. 갈비, 불고기, 된장찌개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홍어, 번데기, 순대로 등급이 높아졌다."(레모)

―요리사 특유의 습관이 있다더라. 반지 안끼고 긴머리 싫어하고. 롤랜드는 점잖은 식사 자리에서도 음식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는 습관이 있다던데.

"내 손가락엔 아무 문제 없다. 건강하고 깨끗하다."(롤랜드)

"너무 빨리 음식을 먹는 것. 남들 밥 먹는 시간에 일해야 하니까. 아내에게 자주 혼이 난다."(레모)

"음식 사진 찍기. 지난 7년간 나라별·장소별로 찍어서 분류한 음식 사진이 내 보물이다."(웨인)

―미감은 어릴 때부터 길러야 한다더라. 부모들에게 조언한다면?

"아이 음식을 따로 만들어 먹이지 마라. 어른들 먹는 보통음식을 줘라. 오이·당근 같은 채소를 날것으로 먹게 하라."

―요리에 젬병인 40대 여성도 지금부터 맘먹고 요리를 시도하면 잘할 수 있을까.

"40대에 외국말 배우기 시작하는 것보다 쉬울걸?"

―'내 마음에 드는 요리'에서 희열을 느끼는가, '손님의 마음에 드는 요리'에서 희열을 느끼는가.

"요리는 내가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만들지. 알프스 산봉우리에 차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야 닿는 식당이 있는데, 오로지 그 집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자동차를 운전한다. 모든 셰프들의 꿈이다."

☞‘하얀 모자’

요리사들이 머리에 쓰는 흰색 모자에서 이름을 땄다. 1978년 파리의 셰프들이 ‘레 토크 블랑시(Les Toques Blanches)’란 이름으로 결성했고, 이후 전 세계에 자발적으로 지부가 생겨났다. 한국 ‘하얀 모자’는 1981년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결성, 현재 회원이 8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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